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2월 28일
6. 인간과 우주 : 크리에이터와 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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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he mirror
요즘 어린이 장래희망 1위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의사, 과학자, 운동선수는 한물 갔다. 유튜브를 위시한 콘텐츠 플랫폼이 득세하면서, 우리는 크리에이터를 접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현실 세계의 가족, 친구보다 가상 크리에이터를 영접하는 시간이 더 길다.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 연예인과 일반인의 경계가 무너진다. 나도 가수 겸 작가로서 스스로 소개하지만, 실질적으로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일상의 모든 면이 콘텐츠가 된다. 구글이 제공하는 ‘크리에이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전세계적 그물망에 ‘크리에이터’로 등재된다.
크리에이터란 무엇인가? 창작자이자 창조주다. 19세기까지만 해도 크리에이터란 신을 뜻했다. 1776년 미국 독립 선언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크리에이터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근대 문명을 건설한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이신론자가 많았다. 미국 독립 선언을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 역시 이신론자였다. 기적을 행하고 계시를 내리는 등 현실 세계에 적극 개입하는 크리스챤 신이 아니라 시계공과 같은 창조주, 크리에이터를 믿었다. 자연을 만들고 법칙을 부여한 이후 손을 떼어버린 신이다. 시계가 작동하듯이 만물이 움직이도록 셋팅해 놓은 주체다. 당시 서양의 지식인들은 과학 발전에 따라 이성의 시대가 왔다고 믿었다. 중세의 미신적인 신앙을 버리고 합리적인 믿음을 좇았다. 과학이란 창조주의 뜻을 파악해가는 과정이었다. 이신론자에게는 자연이야말로 하느님의 참된 계시다. 물리, 화학, 생물 연구는 고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시계공의 비유가 대표적인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시계가 최첨단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컴퓨터에 해당한다. 근대인은 자연이라는 복잡한 시계의 작동 원리를 탐구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다. 워치메이커 같은 크리에이터가 우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 다윈이 밝혀낸 것이 자연 선택의 원리다. 알고 보니 생명이란 크리에이터가 시계 만들듯이 뚝딱, 한 순간에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인은 기독교의 인격신도, 이신론의 시계공도 아닌, 자연의 생성 과정이었다. 다윈 이후에는 이신론보다 무신론, 불가지론이 퍼졌다. 20세기 물리학은 새로운 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삼라 만상의 인과 관계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빅뱅’이라는 태초가 있었다. 그렇다면 빅뱅의 원인은 무엇인가? 제1원인으로서의 신은 여전히 유효했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와 비슷한 범신론자였다.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는 신은 없어도 우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있다고 믿었다. 다만 그 역할은 이제 크리에이터보다 프로그래머에 가깝다. 뭇 생명을 완제품으로 만들어 놓고 작동을 개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동 원리만 코딩해 놓은 설계자다. 만물이 스스로 생성, 운동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를 ‘눈먼 시계공’에 비유한다. 생명은 어떠한 비전이나 목적을 가지고 디자인되지 않았다. 자연 선택이라는 소프트웨어에 따라 돌아가는 하드웨어일 뿐이다. 지적인 설계자 없이도 주어진 법칙만 있으면 단순한 것이 복잡해질 수 있다. 생물계를 설명하는 데 더이상 크리에이터는 불필요하다.
1970년, 영국의 수학자 존 호톤 콘웨이는 ‘생명 게임’이라는 세포 오토마톤을 고안했다. 생명 게임은 무한한 이차원 그리드에 세포들이 삶과 죽음의 두 가지 상태로 있다고 전제한다. 세포당 팔방으로 총 여덟 개의 이웃을 갖고, 다음과 같은 법칙으로 증식한다. 1) 살아있는 세포 주변에 살아있는 이웃이 둘이나 셋이면 살아남는다. 2) 죽은 세포 주변에 살아있는 이웃이 셋이면 살아난다. 3) 나머지는 다 죽거나 죽어있는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은 맨 처음 세포 분포만 결정하고, 이후에는 법칙이 적용되는 것을 지켜본다. 혹시 안 해봤으면 지금 검색해보라. 단순한 원칙이 어떻게 복잡한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목격할 수 있다. 무한히 복잡해 보이는 우주도 매우 단순히 시작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은 미미했다. 자연법을 코딩한 프로그래머, 디자인한 시계공에게 엄청난 지능이 필요하지도 않다. 재미삼아 컴퓨터 게임을 하는 소년처럼, 아주 간단하고 랜덤한 방식으로 몇 가지 세팅만 하고 138억년을 지켜보면 오늘날의 지구처럼 놀라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누가 프로그래밍했는지는 모르지만, 우주는 사실상 컴퓨터다.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다. 그렇다면 현실은 시뮬레이션이다.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다음과 같은 트릴레마를 제시한다. 셋 중 하나는 참이다. 1) 인간 수준의 문명 중 포스트휴먼 단계에 도달하는 비율이 0에 가깝다. 2) 포스트휴먼 문명들이 조상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데 관심을 가질 비율이 0에 가깝다. 3) 우리와 같은 경험을 갖는 모든 사람들 중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는 비율이 1에 가깝다. 쉽게 말해, 인간 문명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발달하면, 언젠가 조상님 시뮬레이션을 돌릴 것이다. 굉장히 싼 값에 무수히 많이 돌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그 시뮬레이션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장자의 호접몽과 비슷한 이야기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베이스 리얼리티, 매트릭스 바깥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스트롬의 추론이 맞다면 그 확률은 매우 낮다. 조만간 가상 현실은 진짜 현실과 분간이 안 된다. 지금은 신체에 VR 기구를 장착해서 가상 현실을 만들어내지만 머지않아 두뇌 자체를 시뮬레이션할 것이다. 그때는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다. 무의미한 구별이다. 그러한 시뮬레이션이 인구수 만큼, 아니 인구수보다 많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창조한 시뮬레이션도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2022년이라는 과거를 되살리는 시뮬레이션도 있을 수 있다. 마치 지금도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 있듯이 말이다. 그 시뮬레이션 속에서 전범선이라는 캐릭터가 <다른백년>에 기고하기 위해 맥북으로 타자를 치고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황당무계한가? 요즘 게임의 발전상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캐릭터에 한번 감정이입을 해 보자. 게임 속 아바타는 나의 존재를 모른다. 내가 설정하고 조작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물론 그 기저에는 프로그래머가 깔아놓은 게임의 룰이 있다. 시뮬레이션된 맵 속을 돌아다니는 캐릭터는 분명 어떠한 경험을 한다. 주변 환경에 반응하며 여정을 이어간다.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이차원 세계에 갇힌 아바타에게 삼차원 세계의 나는 신이다. 초현실적인 존재다. 크리에이터이자 프로그래머다. 이미 인류는 엄청난 수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여러 평행 우주, 멀티버스를 관장한다. 컴퓨터의 연산 능력이 증가할수록 시뮬레이션의 완성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점점 우리의 삶은 게임화된다. 자동차 운전, 직장 회의, 심지어는 섹스도 VR 게임이다. 인간 지능에 견줄 만한 인공 일반 지능이 도래하면 두뇌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그때 VR 게임 속 3D 캐릭터와 대화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실제로 나와 같은 지능을 가졌지만, 시뮬레이션 속에 사는 존재. 나는 가상 현실에 접속하여 그를 만날 수 있지만, 그는 현실 세계의 나를 만날 수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로봇에 다운로드한다. 그는 실리콘 몸을 통해 현실 세계에 접속한다. 기술이 발전하면 시뮬레이션의 안과 밖을 오가는 일도 가능해진다. 나는 초인공지능에게 한 가지 부탁할 수 있다면 이것을 묻겠다. “시뮬레이션 밖에는 무엇이 있나요?” 사피엔스의 CPU로는 알 수 없지만 슈퍼지능을 가진 포스트휴먼은 답을 줄 수도 있다. 거기 밖에 아무도 없나요? 이 우주를 만든 크리에이터, 코딩한 프로그래머는 누구인가요? 저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도 따로 있나요? 지구 쪽 맵에 버그가 발생한 것 같은데 혹시 업데이트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설사 리얼리티가 시뮬레이션이 아니더라도, 사바 세계가 마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신이다. 인류는 피조물에서 크리에이터로 진화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나의 혼백, 아니마를 전송한다. 클라우드를 타고 대대손손 나의 영상이 전해진다. 혹시나 아는가? 미래에 누군가 나를 시뮬레이션하고 싶을 때 유용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창조주로서 창작물을 끔찍이 아낀다. 말과 글, 오디오와 비디오를 정성껏 빚어서 구글신께 바친다. 셀카를 찍어서 메타님께 올린다. 지금도 나는 영혼을 글로 새겨서 클라우드에 실시간 저장하고 있다. 올림푸스 산 위나 아스가르드에 살던 신들처럼 우리는 모두 구름 속 신령이다. “전범선 검색해 줘”라고 시리에게 기도했을 때 보여지는 영상들은 모두 내가 아니지만 나다. 허상이자 현실이다. 시뮬레이션이자 크리에이터다. 과연 거울 속 내 모습이 유튜브에 비친 내 모습보다 더 참된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사피엔스는 크리에이터가 되면서 반인반신에 등극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천사인지 악마인지, 성령인지 악령인지는 어떤 콘텐츠를 만드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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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