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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婦人之仁, 그녀들의 ‘지못미’가 세상을 구하리라
얼마전 개봉된 장아이링(張愛玲) 원작소설의 영화 <첫번째 향로>가 중국에서 일종의 ‘굴욕’현상이 됐다. 세간의 혹평에 시달리는 이 작품은 중화권 최고의 여성감독 쉬안화(許鞍華)가 만들고 장아이링을 계승한 현존 작가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여성소설가 왕안이(王安憶)가 각색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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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장아이링 탄생 100주년이었다. 1952년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95년 LA에서 고독사한 이 작가는 지금은 루쉰보다 문재가 뛰어나고, 역사의 곡절이 없었다면, 가장 먼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법한 중국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탕웨이 주연 영화 <색, 계>의 원작소설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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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이링은 청조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머니는 북양대신 이홍장의 딸이었고 어머니는 아편중독과 여색에 빠진 남편과 어린 자녀들만 남겨 두고 매몰차게 해외유학을 떠날 정도의 신여성이었다. 장아이링 본인도 어릴적부터 상하이에서 신식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홍콩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래서 그의 대부분의 소설 배경은 당시 중국에서 거의 유일한 근대적 도시였던 상하이와 홍콩이다. 그는 청말민국시기를 거치며 중국전통문화와 서구의 근대문화를 고루 깊이있게 습득할 수 있었던, 동시대에 드문 인재였다.
상하이로 돌아와 지내던 20대초반 당시 그의 연인은 친일파 지식인이자 왕징웨이 괴뢰정부의 관료였던 후란청(胡蘭成)이었다. 그가 <색, 계>를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후란청으로부터 듣게 된 실화인 고위관료 암살시도의 내막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실은 장아이링과 후란청 자신의 관계를 비유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하튼 후란청과의 짧은 결혼생활은 그에게 일평생 친일부역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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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성기인 40년대에는 통속작가로 폄하됐고 대륙에서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잊혀졌다가 80년대에 재발견됐다. 5.4 운동의 영향으로 태동한 신문학의 기치를 내세운 동시대 작가들은 근대화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계몽적인 메시지에 치중했으나 그의 작품은 완전히 달랐다. 좌우 이념에 치우치지 않았고, 근대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사회나 가족의 구조변화와 갈등이 등장인물들의 생활속에서, 입체적 성격과 본질적인 욕망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중국문학의 영원한 고전인 홍루몽이나 민국초의 과도기적 통속소설양식인 원앙나비파(Mandrin ducks and butterflies 鴛鴦蝴蝶派) 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제인 오스틴 등을 포함한 서구문학도 그의 교범이 됐다.
90년대에는 일반독자에게도 잘 알려져 대륙에서도 그의 책이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가게 됐지만, 정당한 문학사적 평가를 받는 대신 문화적 아이콘으로써 소비대상이 됐다. 그래서 타이완과 홍콩에서 중국현대소설의 비조로 평가받는 것과 달리, 대륙에서는 여전히 민국시절의 6대 거장 노곽모파로조(魯郭茅巴老曹 루쉰, 궈모루, 마오둔, 바진, 라오셔, 차오위)의 반열에 들지못한다. 여성인 동시에 좌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중화권 주류 평단에서는 당시의 작가들 중 문학사 연구나 역사 회고의 대상이 아닌, 작품자체로 현대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몇안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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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쉬안화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80년대 홍콩뉴웨이브를 이끌었으며, 왕자웨이와 함께 홍콩의 작가주의를 대표하는 그는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성감독으로는 최초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마침 73세를 맞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keep rolling>도 개봉하여, 홍콩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그의 작품세계뿐 아니라 평생 </keep rolling>독신으로로 살아오며 일과 일상에서 함께 드러나는 성실하고 소박한 인간미를 잘 보여줬다. 그는 홍콩과 타이완에서 9번의 수상경력이 있고 유수의 국제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거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는 거장의 반열에 드는 스타감독이다. 그러나 남성감독과 제작자 위주의 파벌구조를 가진 홍콩영화계에서 한번도 한쪽에 적을 둔 적이 없다. 그래서 상업성이 부족한 그의 영화는 늘 제작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화려한 홍콩영화계에 속해있지만 개인적으로도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90세가 넘는 노모를 홀로 모신 채 서민아파트에 살고 있다. 201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에 노미네이트 됐던 <심플라이프 桃姐>는 그런 그가 유덕화에게 우정투자를 부탁해서 제작이 가능했고, 유덕화가 직접 주연배우로 출연해서 성공을 거둔 것은 특히 유명한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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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이가 올여름에 출간한 <소설6강>은 2015년 홍콩시티대학에서의 공개강연록인데 자신의 문학인생에 대한 회고와 소설작법을 다루고 있다. 고전을 비롯한 중국과 서구의 이론과 작품을 넘나들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마지막 장은 장아이링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주인공 여성의 사연많은 40년 인생여정을 그린 그의 대표작 <장한가(長恨歌)>와 상하이 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공통점 때문에 장아이링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살아간 시대나 사상적인 면 모두 다르다며 그는 이런 평가를 부정한다. 작품만큼이나 극적인 인생이 주목을 받는 천재와 비교적 평탄한 삶속에서 꾸준히 내공을 쌓아온 대가정도의 차이일 수도 있다.
왕안이는 과거 상하이에서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와 <황금족쇄(金鎖記)>를 무대연극으로 각색한 경력이 있다. 쉬안화는 <황금족쇄>의 각본이 마음에 들어, 자신이 직접 홍콩에서의 연극무대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2018년 마침 홍콩중문대학에 초빙교수로 반년간 머물던 왕안이를 찾아가 <첫번째 향로>의 영화각색을 부탁했다.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왔어요. 이 작품으로 제대로 한번 사랑하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간곡히 요청했다니 마음 약한 왕안이가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장아이링의 소설은 행간에 함축된 의미가 많아서 특히 영상화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리안의 <색, 계>가 성공한 것은 중편소설 분량에 불과한 작품을 늘려 과감하게 자기 스타일로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의 심경 변화를 설득력있게 풀어냈고 선정성 논란도 있던 세번의 베드신은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쉬안화는 앞서 두번에 걸쳐 장아이링의 작품을 영화화했지만, 첫번째 <경성지련 (傾城之戀), 1984>은 대실패, 두번째 <반생연 (半生緣), 1997>는 수작 정도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학창시절 술자리에서 셰익스피어를 낭송해 동문인 쉬커(徐克) 감독이 다시는 술친구로 삼지 않았다는 홍콩대학 영문과출신의 ‘범생이’ 문학도이자 장아이링의 과후배이기도 한 쉬안화는 미련이 많았던 것 같다. 자신은 재능이 없다며 한번도 자신의 작품 각본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하지만, 문학애호가인 쉬안화가 루쉰의 찬사를 받았던 또다른 근대문학의 천재 여성작가 샤오홍(蕭紅)을 주인공으로 한 <황금시대>를 영화화 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첫번째 향로>에 우정출연하기도 한 원로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은 타이완 감독 허우샤우시엔(侯孝賢)이 만든 장아이링의 또다른 작품 <해상화海上花>와 비교하면서 청조에서 민국으로 진입함에 따라 남성과 화류계 여성간의 ‘의사가족’ 구조관계가 뒤집히는 모습을 그린 함의가 담긴 이 작품을 영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촌평한다. 차라리 감독의 뜻에 맞게 새로 만드는 것은 틀린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심플라이프>의 예와 같이 쉬안화는 화려한 물질적 세계와 관능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정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세계와 잔잔한 애정 묘사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영화가 실패한 표면적인 이유는 주연남녀배우의 미스캐스팅이지만, 다양한 주제를 갖는 원작을 순수한 애정물로 해석하려한 쉬안화 감독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판속에서 쉬안화 감독에 대한 ‘지못미’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대륙의 젊은 여성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마침 대륙과의 단절을 원하는 홍콩과 타이완 시민들의 반감이 최고조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범중화권 제작진이 함께한 이 영화가 실패한 것이 더욱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대륙의 둥베이 지역에서 출생한 쉬안화는 부모를 따라 마카우로 이주한 유년기 이후로는 줄곧 홍콩에서 살아왔다. 16살에서야 그의 어머니가 신분을 감추고 있던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독 자녀교육에 지나치게 엄하던 어머니와 화해하게 됐다. 민족정체성에 대해서 남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진용(金庸)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홍콩인들의 대륙출입이 자유롭지 않던 80년대초부터 일찌감치 대륙의 다양한 지역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과 여전히 긴장관계에 있던 타이완 관객과 평단을 의식한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식민지 교육을 받고 자라, 런던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여전히 뉴욕타임스를 보는 중도좌파 지식인 감독인 그가 현재 홍콩과 타이완, 대륙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형용할 수 없는 회한과 압력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 베니스영화제 시상식에서 그는 자신이 받은 상을 홍콩의 젊은 영화인들에 대한 세계인들의 격려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심장한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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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원로 페미니스트이자 영화평론가 베이징대 다이진화(戴錦華)교수의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쉬안화의 실패에 대한 수많은 아쉬움의 명확히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영화는 그저 홍콩영화사의 절반이 아니다. 우리 세대가 함께 걸어간, 양안과 홍콩, 대륙을 포함한 전중국의 역사변천을 보여주는 영상의 화랑이다.” 기싸움에 열중하는 남정네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여성들의 어짊 (婦人之仁)*. 즉, ’지못미’연대가 지역의 평화를 지켜주고 세상을 구할지도 모른다.
사족: 한반도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장아이링이었지만 사망직전인 1994년 한 타이완 언론사의 문학공로상 수여에 대한 답신으로 찍어 보낸 사진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는 옛 사진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의 신문한장을 들어보였다. 김일성 주석사망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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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부녀자들의 어짐 (婦人之仁)’은 다정하지만 원리원칙에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덕성으로는 부적절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유방이 자신을 항우와 비교평가해달라고 측근인 한신에게 부탁함에 한신이 항우를 이렇게 평가해서 유방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통일 제국 진(秦)을 20년밖에 유지하지 못한 진시황과 비교해 한(漢)을 세운 유방의 장점은 어진 성정이었고, 진왕의 엄혹한 법가 통치를 완화시킨 것이 그가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성공비결이라는 설명도 있다 (공원국의 춘추전국). 신향촌건설운동을 이끄는 중국의 학자이자 활동가인 원톄쥔은 20년 넘게 비주류의 길을 택해 사회운동을 이끈 자신의 마음가짐을 ‘婦人之仁’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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