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7월 12일
7. 활물자연계와 지구와 사람이 생성하는 농시(農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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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이성이 낳은 도시 다음에는 농시(農侍)다. 농시는 농사 짓는 농업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문명을 기른다는 기를 농이고, 시장 시가 아니고 모시는 곳이다. 하여 기를 농農, 모실 시侍의 농시農侍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활물자연계, 지구, 사람의 연결망을 생각한다.
인터넷 세상을 생각한다. 인터넷 세상은 아직은 근대 도시 공간을 움직이는 핵심 원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인터넷은 사회화되어 있다. 오래된 산업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개념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다. 인터넷 공간은 생산, 교환, 소비, 감정(욕망, 쾌락, 기쁨, 슬픔)이 공유되고 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현재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것들은 새로운 문명의 징검다리를 놓으면서도 여전히 부르주아지적 산업문명의 공간이다. 인터넷이 생산하는 거대한 부는 구글 등의 메타기업에 집중 집적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근대이성이 만든 산업문명의 원리가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인터넷이 사회화되었다는 것은 근대의 산업노동이 사회화되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소유는 여전히 사회화가 아닌 사유화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여전히 계급이 작동한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 메타버스가 사회화 되고 있다는 것은 기회이기도 하다. 메타버스망이 후술하는 생산이 아닌 생성의 핵심 기반이 된다면 이는 생성수단의 사회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든지 스마트폰만 있으면 생성수단의 사회화 주체에 참여 가능하다. 어마어마한 계급투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메타버스 내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나라(통치체제라는 국가가 아니다.)가 세워질 수 있다.
사회라는 말도 그렇다. 사회는 사람들의 공간일 뿐이다. 근대이성이 자원으로만 대상화한 지구∙자연이 함께 하는 곳은 아니다. 기후氣候는 기氣의 상태다. 표준국어사전은 기후를 ‘대기(大氣) 상태’라고 정의한다. 기후위기는 기후나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사람의 위기를 말한다. 사람의 위기이기에 기후위기가 아니라 기후변화다. 기후변화는 지구가 자기생명 전개, 지구의 자기조직화를 활발하게 하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근대이성이 파산을 맞았음을 증명한다. 기후변화는 기(氣)주체다. 이성주체가 아니다. 이는 근대와 다른 문명전환이 필요함을 말하고 그것은 이성의 시대가 아니다. 사회를 이렇게 본다면 근대사회주의 또한 파산이라 하겠다. 사람들만의 연합인 사회가 아니라 지구(모든생명과 물질)와 메타버스와 사람이 호혜적으로 연대된 개념이 필요하다. ‘사회’社會는 영어 ‘society’를 일본 정치인 후쿠치 오우치가 만든 말로 알려져 있다. 동양에는 없던 말이다. 주식회사의 회사는 사회의 어순만 뒤집어 놓았다. 일본말이라서가 아니라 일본식 근대주의 개념이 문제다. 문명전환기에는 기존의 개념들을 폐기하고 새로운 말을 만들거나 ‘생명’이라는 일본말이 한국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김지하 등에 의해 얻은 것처럼 개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사회와 관련하여 광주의 김상윤 선생이 가르침을 주셨다.
“옛날에 뽕나무로 구획된 넓은 고을 마당을 ‘사'(社)라고 했답니다. 겨울 내내 사냥을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오는 봄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사에 모여 큰 축전을 열었다고 하지요. 그 모임을 ‘사회’라 했답니다. 사회에서 벌어진 일은 그것이 무슨 일이었던지 윤리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지요. 공자도 사회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것이라고 하더군요. 동양의 사회는 원래 ‘풀고 여는 모임’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출처는 중국인 하신(何新)이 쓴 「신의 기원」 – 홍희 역, 동문선 문예신서9 –이지요.”
중국 주나라의 고사에서 나온 ‘공화’를 일본인이 서구의 ‘Republic’ 번역어로 채택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처럼 ‘사회’ 역시 의미가 달라졌다. 하신의 ‘사회’는 우리 고대의 이야기 ‘신시’, ‘소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신의 사회, 우리 고대의 신시, 소도의 문명 원리를 재발견하여 미래 문명화한다면 그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19세기형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신사회주의가 된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어떤 사상의 고유명사로 굳어진 한, 거기에 수식어 ‘신’자를 붙이기보다는 신조어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더구나 기후변화는 근대이성의 한계를 노출했으며 지구 역시 사람처럼 생명임을 증명하고 있다. 생태란 생명들의 그물망이지 숲, 강, 기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태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마뜩잖다. 더구나 신문명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관계망을 말한다.
이병한이 말한 바의 활물(活物) – 디지털 생태계가 있다. 이병한이 명시적으로 ‘활물자연계’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각을 필자는 활물자연계라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활물자연계의 약육강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화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윈은 진화를 발전의 뜻이 아니라 자연선택에서 생명의 자기전개라고 하였으나 스펜서 등은 발전의 뜻을 담은 진보로 만들었다. 자연의 원리를 상호부조적인 경쟁으로 논파한 사람은 크로프트킨이다. 수운은 기와 영 주체의 생성원리로 우주 질서를 말했다. 필자는 진보가 아니라 생명의 자기전개, 상호부조와 생성의 관점에서 이병한의 문제의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활물권력에 대해서 그가 아직 발언하지는 않지만 기대하고 있다. 지금 이병한은 활물자연계가 동학이 말하는 경물(敬物)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은 더 이상 숲, 강 등의 그 자연이 아니다. (이병한의 활물자연계는 본지 다른백년의 이병한의 「미래견문」 참조)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AI), 메타버스의 활물자연계, 무궁한 천상자원(바람, 태양 등), 지구 자체, 사람들 사이의 결합 원리가 새로워지고 있다. 그 핵심은 노동계급투쟁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주체인 지구생명과 활물자연계다. 기(氣)가 인간 이성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거나 우려할 일은 아니다. 기를 먹고 사는 활물자연계의 기를 인간은 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구는 어찌할 수가 없다. 활물자연계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반대한다고 멈춰질 일도 아니다. 지구, 활물자연계, 사람이 서로를 기르고 모시는 농시를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라서 장담하겠는가? 활물자연계가 전혀 새로운 권력을 잉태하여 종결이라는 뜻의 터미네이터세를 가져올지, 다시개벽세를 가져올지 필자는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다시개벽세이기를 바랄 뿐이다.
활물자연계가 경제 또는 사람들의 살림살이 대부분을 생성할 날이 멀지 않았다. 20년 후면 그러지 않을까? 생산이 아니라 생성이다. 라투르가 저자인 「녹색계급」의 출판사 서평은 생성을 이렇게 말한다.
“라투르는 이러한 새로운 성장과 보호가 ‘생성 시스템’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생산 시스템’이 인간이 자연의 사용자로서 행위하는 인간중심적인 관점이라면, ‘생성 시스템’은 인간이 지구에서 사물을 포함한 비인간 행위자와 더불어 여러 존재 중 하나가 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간의 관계가 부각되면서 갈등과 상호작용이 중요해진다. 이를 통해 인간과 생산을 중심으로 할 때 포착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살펴볼 수 있다.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도시에서 소비하는 어떠한 상품의 생산지가 농촌이라고 할 때, 상품의 완성도 못지않게 생산지에서의 생산 조건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동학 주문 시천주 조화정의 조화정이 생성이다. 생성은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체계다. 생성은 사건들의 연결 그물에서 생긴다. 나 홀로는 없다. 어떤 무엇이 그 단독으로 객관적으로 실재하여 움직인다는 객관주의, 역사주의, 시간 등의 기계적 유물론이 아니다. 역사(시간이)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하여 자기조직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생성이 없으면 역사도 시간도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도 않다. 현대물리학은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로 시간을 측정하나 이제 달라졌다. 양자컴퓨터의 지구 몇 십억 년의 연산 시간과 사람의 연산 시간은 비교할 수 없다. 아말반도의 순록부족과 메타버스족의 시간은 다르다. 지구의 시간은 비교적 태양의 시간을 따르지만 변화는 기후변화 시대에 확률적으로만 예측가능하다.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다가오는 세계는 다차원적 세계라는 뜻이다. 양자중첩이고 양자도약이다. 지구에는 아마존의 부족과 양자컴퓨터 부족이 공존한다. 다차원 세계에서 연결망들은 새로 짜여진다. 누군가가 짜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와 자기진화로 짜질 것이다. 그 또한 무위이화인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다차원적 세계의 결합관계를 프로그래밍할 영성이 있다. 그것은 근대의 합리적 이성으로 할 수 없다. 근대경제학은 합리를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것을 합리라고 가르친다. 경제학, 사회학, 인문학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전개 앞에서 지금 허둥대고 있다.
기후변화는 근대이성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보여준다. 근대는 이성이 지배했는데 기후변화는 근대이성이 더 이상 작동하기가 어려워진 시대임을 보여준다. 산업문명 원리가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다. 기나긴 지구 역사에서 고유명사가 된 근대는 그 자체로 문명의 전환기일지도 모른다. 근대의 현재 국면이 전환기가 아니라 근대 자체가 45년 지구 생명사에서 전환기일 수 있다. 근대의 시간 1년은 과거 천 년과 같다. 근대 자체를 전환기로 본다면 이는 근대에 대한 인간들의 이해가 달라졌음을 말한다. 신상태라는 뜻의 근대가 아니라 전환기라면 신상태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근대라는 전환기가 지금 현재 임계점인가? 그 임계점이 파국적인가, 아니면 평화일 것인가가 문제다. 생명사상연구소의 주요섭 소장이 애용하는 폼생폼사(Form生Form死)인가? 폼사폼생인가?
무엇을 기르고 모시는 농시인가? 다음 회에서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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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