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3월 21일

8. 어느 날 그렇게 비건이 되었다



6년 전, 1년 넘는 시간 동안 끔찍한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매일 반복되는 폭력에 나의 몸과 마음은 지독하게 병들었다. 식욕 저하가 심해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170cm의 키에 44kg까지 살이 빠져 앙상하게 뼈가 보였고, 죽음만 바라보며 겨우 살아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져 입술에 포진이 사라지지 않았다.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려 침대에서 나오는 일조차 버거웠다. 신경쇠약,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인생 최악의 정점을 달리던 어느 날,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면역력 저하와 스트레스로 인한 후천적 한포진이 발병했다. 참을 수 없이 간지럽고 아팠다. 작열통과 흡사한 통증에 밤새 물집이 터지고 피가 날 때까지 긁느라 잠을 설쳤다. 터진 수포는 옆 발가락으로 옮겨갔고 발바닥까지 퍼져 상처가 갈라지고 고름이 생겼다. 마음의 상처가 피부로 발현된 모습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극심한 통증은 처음이었다. 발가락을 절단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신발을 신으면 아파서 앞이 뚫린 슬리퍼만 신었다. 양말을 신으면 고름이 달라붙고, 상처의 몰골이 너무 흉측하게 보여 발에 붕대를 칭칭 감아 발을 감췄다.

아픈 발을 이끌고 유명하다는 병원을 모조리 찾아갔다. 피부과, 내과, 한의원… 한약의 비싼 약 값과 더딘 약효에 비해, 양약의 짧고 굵은 진통 효과에 중독되었다. 스테로이드 계열의 양약을 도포하면 일시적으로 통증이 가라앉을 뿐, 금세 약에 내성이 생겨 증상은 악화되었다. 가뜩이나 심리적으로 고달픈데 몸까지 말썽이니 살아있는 게 너무 가혹했다.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았다.

죽지 못해 살아서 오랜 시간 병원에 내원하던 중, 문득 모든 병원의 선생님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건 바로 고기와 유제품을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동물성 식품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성질이 있으니 멀리하기를 권고했다. 조금이라도 통증이 가라앉길 바라는 절박한 심정에 바로 육식을 중단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기적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발가락의 가려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2년 동안 아주 많은 약을 발라보고 병원에 들락거려도 나빠지기만 하던 병이 처음으로 호전 증세를 보였다. 여전히 아프고 간지러웠지만 감내할 만한 정도의 괴로움이었다.

가족의 도움으로 가해자 고소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증거를 수집하느라 내가 겪었던, 여전히 겪고 있던 폭력을 계속 마주하는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담당 형사에게 “가해자가 불쌍하지도 않냐. 용서해 주면 안 되냐”라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몇 주 뒤, 가해자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매일같이 그의 모부가 고소 취하를 요구하며 찾아와 집 밖을 나설 수 없었다. 하도 신고를 하느라 동네 경찰관들의 얼굴을 전부 외웠다. 몇 달 뒤 가해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유독 성범죄자에게 관대한 솜방망이 처벌 사례를 익히 알기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직접 치른 현실은 충격과 공포였다. 가해자는 출감 후 지옥 같은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무시하고, 또 무시하다, 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갔다. 연락이 닿을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차단하고 한동안 숨어 지내야 했다. 나를 감추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다.

고장난 몸을 고치려 의식적으로 채식에 도전했다. 한포진 환자 카페에 가입해 정보를 모색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고기나 동물성 식품 섭취를 억제하고 있었다. 물론 그에 따른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겪는 음식과 몸의 관계를 조금씩 이해해가며, 건강한 몸에는 섭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처음 자각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냐에 따라 몸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달았다. 매일 요가와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니 10년 동안 앓던 병이 완치되었다는 후기도 있었다. 나와 같은 병을 앓다 쾌유되었다는 사람들의 식이요법을 따라했다. 육류를 줄이고 가공식품도 줄이니, 끝이 안 보이던 한포진이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생 시달리는 바람에 약간 적응해버린 과민성 대장 증후군도 완화되었다. 변비 혹은 설사가 아닌 정상적인 배변 활동을 매일 할 수 있다니! 보통의 사람들은 매일 이런 짜릿함을 느끼며 살아왔다니! 평생 쾌변을 해온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배신감마저 들었다. 주체적으로 성취한 건강을 통해 희망을 보았달까. 조금씩 의식적으로 섭생하며 매 끼니 경외감과 충만함에 가득했다. 몸이 좋아지니 마음도 함께 아물기 시작했다. 요가와 명상을 병행하니 치유에 가속도가 붙었다. 죽지 못해 살아있다가, 꽤 살만해지니 건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끓었다.

육식을 중단하고 드라마틱한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더욱 열정적으로 섭식을 공부하고 싶었다. 도대체 고기가 왜 이렇게 해로운지, 그동안 어떻게 고기를 먹으며 살아온 건지 궁금해졌다. 호기심과 욕망 자체가 오랜만이라 무척 들떠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채식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대부분 건강 요법, 채식 위주의 도서를 접하다가, 알고리듬의 영향으로 나의 인생을 바꾼 책을 만났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멜라니 조이의 저서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멜라니 조이는 ‘육식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우리가 끊임없이 육식을 정당화하며 혐오감 없이 동물을 먹는 행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식용 동물’과 ‘반려 동물’의 구분은 무엇인지, 육식이 자연스러운 행위라면 영아살해와 살인, 식인 풍습 역시 자연스러운 것인지. 인간이 설정한 먹이사슬의 모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도살장에서 근무한 노동자가 겪는 비인도적 근무 환경과, 그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세하게 서술한다.

이 책에서 나는 ‘동물권’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다. 동물도 권리를 가질 수 있고, 나처럼 얼굴이 있고, 숨을 쉬고, 쾌고 감수성을 지닌,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여전히 생생하다. 공장식 축산으로 대량 학살되는 동물은 짧은 생애 동안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몸집만 한 철창에 갇혀, 평생을 배설물에 뒤덮여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된다. 비좁은 감옥이 그들 세계의 전부다. ‘고기’가 되기 위해 계획된 상품으로 태어나 항생제와 오물 따위의 사료가 주입된다. 자연 수명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시간을 아픔에 몸부림치다 잔혹하게 도살된다. 그들의 신음으로 얼룩진 피는 감쪽같이 삼겹살로, 치킨으로, 꽃등심으로, 가죽으로 둔갑한다.

동물이 처한 삶은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이야기였다. 내가 먹어온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게 되는지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었던가? 고기를 끊는 과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본래 닭발이나 순대, 곱창 같은 음식을 역하다는 이유로 못 먹는 식성이었다. 하지만 유제품이 첨가된 디저트나 빵은 끊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간간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먹고 나면 아프기 십상이었다.

동물권을 공부하다 우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알게 되었다. 낙농업에서 여성 소는 강제 임신, 즉 강간을 통해 출산한다. 평생 출산과 강제 착유를 반복하다 상품성이 떨어지면 도살되어 고기가 된다. 여성 소가 출산한 아기소는 성별에 따라 고기가 되거나, 새로운 ‘젖 짜는 기계’가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자발적으로 소의 젖을 입에 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계란은 생명을 해치지 않는데,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계란도 다를 바 없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계란은 여성 닭의 ‘월경 부산물’이다. 본래 닭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무정란을 낳는 동물이었지만, 인위적인 유전자와 호르몬 조작을 거듭하며 지금은 하루에 한 번 알을 낳게 되었다. 기형적으로 가속화된 신체적 변화에 닭들은 알을 낳느라 영양소가 부족해 뼈가 부러지고, 죽음에 쉽게 노출된다. 그렇게 태어난 여성 병아리는 ‘알 낳는 기계’가 되어 출산을 반복하다 죽으면 ‘치킨’이 된다. 재생산권이 없는 남성 병아리는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갈려 치킨 너겟이 된다. 좁은 철창이 아닌 초원에서 자란 ‘방목 유정란’ 혹은 ‘복지 계란’도 결국 닭이 원치 않는 죽음을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계란은 닭을 죽인다. 그래서 나는 닭을 죽이는 닭알과 소를 죽이는 소젖도 먹지 않는 비건이 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가부장제 사회를 마주할 때처럼, 비거니즘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쓰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을 겪으며 항상 피해자로만 살아오던 내가 처음으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비인간 동물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처지다. 그들은 저항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고기’라는 주어진 삶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내가 허약한 상태일 때, 고기로 뭉쳐진 죽음이 사나운 형상으로 발에 나타났다. 나는 죽음을 똑똑히 보았다.

육식이라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앞에서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당장 내가 소비를 멈춰도 몇십억 인구의 입에 들어가기 위한 동물들이 매 순간 사라지고 있었다. 편의점에 가서 동물성 성분이 들어간 상품을 보면 잔인한 민낯이 상상돼 눈물이 차올랐다. 며칠간은 음식을 먹는 행위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길을 걷다 시야에 들어오는 고깃집, 치킨집, 해장국집, 모든 음식점이 폭력으로 보였다. 거리에서 풍기는 냄새조차 맡기 버거웠다. 온 세상이 착취로 양산된 허망한 비극이었다.

오래도록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떠돌고 곧잘 숨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한 결코 해방될 수 없었다. 모두가 아닌 나만의 자유는 공허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자유, 질서 없는 자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에게 페미니즘이 세상과 공존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다면, 비거니즘은 그 고리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죽은 동물을 밥그릇에 두고 평화를 말하거나, 편의 앞에 죽음이 묻히는 행태를 방관하고 싶지 않다.

비거니즘을 만나고 내가 염원하던 삶의 조화를 배우는 중이다. 누군가를 짓밟고 사랑을 외치던 나는 항상 무언가 놓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안다. 누구도 완벽한 비건이 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존재를 도태하지 않는 방향을 고민할 수 있다. 종을 아우르는 평등을 꿈꾸며 사랑의 광범위한 의미를 깊게 배운다. 매일 사라지는 동물을 기억하며 고통 없는 식사를 수행한다. 이 영험한 의식을 통해 나의 영혼은 무한대로 맑아지고 성장한다. 비거니즘은 사랑의 방법론이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나를 깨끗이 변모시킨 질병과, 궁극적으로 충만함을 영위하게 해준 일련의 사건들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잠에 들기 싫던 나의 모습이 희미하다. 물론 폭력이 없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고통을 겪어봤기에 다른 존재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다.

피해자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선택한 이후 나는 해방을 맞이했다. 피해자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피해자의 위치에서 정체하는 것은 다르다. 책망하는 대상에게서 진심 어린 속죄를 바라는 이상 나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기대하는 마음은 절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가족을 용서했고, 과거의 연인을 용서했고, 친구를 용서했고, 그 외 수많은 이들과,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그제서야 나 또한 용서받을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용서할 거란 말인가? 그들이 용서받지 못한다면, 누가 날 용서할 것인가? 날 피해자의 위치에 있게 한 대상을 원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 분노를 통해 나의 삶을 찾고자 한다. 원망하는 주체와 분노하는 주체는 용서하는 행위로 구분된다. 충분히 미워했고, 더 이상의 원망은 나의 소실을 야기한다.

고통을 느끼는 이들과 연대할 때, 가장 순수한 위안을 느낀다. 그 연대의 형태는 한 끼의 비건 식사를 하거나, 가죽이나 모피를 소비하지 않거나, 동물실험에 반대하거나, 쓰레기를 덜 만들거나, 기부를 하거나, 동물원을 철폐하는 게시물 공유가 될 수도 있다. 느끼는 존재로서, 나보다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에 다가가고 싶다. 막연한 희망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돌봄 스무디 보울>

면역력이 떨어질 때는, 유산균과 비타민이 풍부한 요거트 보울.

재료 : 무첨가 두유 혹은 코코넛밀크, 유산균 캡슐, 바나나, 아로니아, 딸기, 블루베리, 카카오닙스, 각종 씨앗(헴프, 치아, 호박, 아마 등), 코코넛 플레이크, 견과류

유산균 캡슐을 열어 가루를 무첨가 두유 혹은 코코넛밀크와 잘 섞고, 빛이 들지 않는 25도 이상 따뜻한 곳에서 8시간 이상 발효한다. 잠들기 직전에 하는 걸 추천. 일어나 확인하면 요거트가 완성돼 있다.

마찬가지로 잠들기 전에 바나나, 아로니아, 딸기 등 과일을 얼려놓는다.

믹서기에 요거트, 두유, 얼린 바나나, 아로니아, 딸기, 블루베리, 카카오닙스, 견과류를 넣고 곱게 간다. 너무 묽지 않고 떠먹기 좋은 되직한 질감이 좋다. 얼린 과일이 없다면 얼음을 더해 갈아준다.

깊은 그릇에 스무디를 붓는다. 과일, 씨앗, 코코넛 플레이크, 카카오닙스, 견과류를 취향에 맞게 올려 먹는다.




편지지
카메라를 들고 지구를 유랑하는 낭만적 유목민. 네트워크 안팎에서 이미지와 신체로 연결되는 작업하는 사람. 기술을 경유해 생명의 공통 언어를 모색하는 미학적 수행자. 종의 경계가 허물어진 생태적 관계망을 상상하며, 더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채집한다.


전범선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