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2년 4월 11일
9. 천지인문학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281543718670603/
인문학이 위기다. 대학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걱정이다. 왜 그럴까? 대학의 역사는 인문학의 역사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볼로냐 대학 출신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페트라르카는 신이 전부였던 중세 유럽의 막을 내리고, 인간을 무대 위에 올렸다. 이후 생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도 마찬가지다. 신학에서 인문학으로 화두가 옮아갔다. 유니버시티(University)에서 유니버스(Universe), 우주 전체보다 휴머니티스(Humanities), 인문 과학이 갖는 비중이 커졌다. 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주의를 낳았다. 신이나 자연보다 인간을 연구했다. 오늘날 대학은 인재, 즉 인간 재료를 만드는 공장이다. 자본이 증식하기 위해 필요한 휴먼 리소스를 공급한다. 다른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는 인간을 생산한다. 인간보다 자본이 먼저이기도 하지만, 하늘땅보다 사람이 먼저다. 대학에서 우주 전체에 관한 심도 깊은 공부는 사라졌다. 학문이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기술화되었다. 종교와 영성이 빠졌다. 유니버시티라고 하기에는 유니버스에 대한 관심이 적고, 대학(大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배움이다.
인문학은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다. 휴머니즘이 주체로 상정한 ‘휴먼’, ‘맨’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인간이다.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백인 남성. 이러한 인간을 탐구하는 방법은 이성이다. 분류하고 측정하는 방식이다. 나누고 잰다. 비율을 계산하여 완벽을 추구한다. 주체를 인간으로 상정하니 권리도 인간 밖에 없었다. 휴먼-이즘, 인문주의는 이성을 근거로 인권을 옹호했다. 하지만 푸코가 선포했듯이 이제 ‘맨’은 죽었다. 맨의 죽음은 휴먼의 죽음이자 휴머니즘의 끝이다.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의 시작이다. 인문학은 가고 초인문학이 온다. 인간을 무대 위에서 내리고 우주를 올릴 때다. 유니버시티의 참 목적은 유니버스 연구다. 큰 배움, 대학 또는 태학은 우주 공부일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를 정의하는 방법은 무한하다. 전범선이라는 개인으로, 한국인 남성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일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어떤 정체성이 우선이냐가 관건이다. 인권의 패러다임은 ‘인간’을 앞세운다. 물론 아직도 휴머니스트이기 전에 인종, 성별, 민족, 계급 등을 내세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적어도 법적이나 정치적으로는 ‘사람이 먼저다’가 올바른 견해다. 나를 무엇보다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사피엔스라는 영장류 종에 대한 멤버쉽이 최우선이다. 인간다움이란 이성적인 것이다.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권리가 있다. 로고스, 즉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말할 줄 아는 인간만이 진리 탐구의 대상이다.
나를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은 한국인 남성으로 정의하는 것 만큼이나 편협하다. 나는 인간이기 전에 동물이다. 나를 사피엔스라는 특정 종이 아닌 동물계, 애니멀 킹덤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것이 동물권의 패러다임이다. 동물다움이란 감성적인 것이다. 느끼는 존재가 동물이다. 고통과 행복을 느끼는 능력이 있다면 권리도 있다. 인간이 아닌 동물, 짐승, 중생을 주체로 설정하는 순간, ‘맨’은 죽는다. 나를 동물로 보기 시작하면, 인문학은 답답하다. 말과 글로 담지 못하는 동물적 느낌이 있다. 숫자와 통계로 표현할 수 없는 번뇌가 있다. 이성에서 감성으로 패러다임이 옮겨간다. 내게 권리가 있는 이유는 생각하는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감각하는 동물이라서다.
아니, 식물은 고통을 못 느끼는가? 척추 신경계의 반응이 없더라도 모든 생명은 살아있고,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나는 동물이기 전에 생물이다. 나를 동물계의 일원이 아닌 살아있는 목숨,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이 생명권의 패러다임이다. 생명다움이란 영성적인 것이다. 생성하고 자기조직하는 존재가 생물이다. 살아 있음, 생존은 쾌고감수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되기의 문제다. 삶이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근본적으로 내재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를 생물로 보기 시작하면, 뭇 생명이 한 울타리, 한 울이다. 결국 역사의 진보란 울타리를 넓혀가는 흐름이다. 개인에서 민족, 민족에서 인류, 인류에서 동물, 동물에서 생명으로 권리의 주체를 확장한다. 과거에는 왕 혼자 가지고 있던 권리를 이제는 뭇 생명이 갖는다. 이성에서 감성, 감성에서 영성으로 패러다임이 넘어간다. 내게 권리가 있는 이유는 생각하는 인간이라서도, 감각하는 동물이라서도 아닌, 신령스런 생물이라서다.
그렇다면 무기물은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가? 백인과 유색 인종, 남과 여,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되어도 생물과 무생물은 괜찮지 않나? 장일순은 좁쌀 한 알에서 우주를 보았지만, 윌리엄 블레이크는 모래 한 알에서도 세계를 보았다. 그의 시, ‘순수의 전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의 공간을 쥐고 / 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붙잡는다.” 스티브 잡스는 블레이크를 읽으며 아이폰을 만들었다. 그 덕에 우리는 손바닥 안에 무한의 공간을 쥐고 있다.
한국 화엄종을 창건한 의상대사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가 있고, 온갖 티끌 속에도 마찬가지다. 무량한 시간이 찰나의 생각이고, 찰나의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다. 18세기 블레이크의 직관은 7세기 의상의 메아리다. 21세기, 우리는 시방 세계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시방이란 십방, 즉 동, 서, 남, 북, 동남, 서남, 동북, 서북, 상, 하 총 10개의 방향이다. 시방이 계(界)를 이루고 과거, 현재, 미래가 세(世)를 이룬다. 다시 말해 세가 시간이고 계가 공간이다. 하나로 흐르는 시간과 열 개로 나눠진 공간이 시방 세계다. 그런데 1996년, 현대 물리학의 초끈이론을 통합한 M-이론은 우주가 총 10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시방 세계의 직관과 일맥 상통한다. 뉴턴은 3차원인 줄 알았고, 아인슈타인은 4차원인 줄 알았던 우주에 알고 보니 숨겨진 6차원이 더 있다는 것이다.
끈이론에 따르면 물질을 이루는 근본은 1차원적인 끈의 떨림이다. 현상계의 물질을 나누고 나누고 나누면, 분자 속에 원자, 원자 속에 쿼크, 쿼크 속에는 끈이 있다는 것이다. 끈은 길이는 있지만, 높이나 너비는 없는 1차원의 에너지다. 사바 세계에 드러나는 물질의 질량이나 정전기의 양은 감춰진 세계의 떨림이 결정한다. 삼라 만상이 결국 기타 줄과 같은 스트링의 조화인 것이다. 몸과 마음,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하나로 설명된다. 아인슈타인이 끝내 찾지 못했던 ‘모든 것의 이론’에 가장 가까운 것이 끈이론이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 말 그대로 우주 전체를 끈의 떨림으로 이해한다. 1990년대 우주론에서 홀로그래피 원리를 제시한 레너드 서스킨드는 60년대부터 끈이론을 개척해온 선구자다. 뉴턴-데카르트의 고전 역학 모델을 넘어서,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통합하려는 20세기 과학의 최신 모델로 비추어 볼 때, 인간은 더이상 개인(individual)이 아니다.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분명히 나누어질 수 있고(dividual), 나누다 보면 쿼크가 있다. 오늘날의 ‘모래 알’, ‘작은 티끌’은 쿼크다. 끈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스트링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지만, 입자가 파동이라는 역설적 진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정리하자면, 나는 인간이기 전에 동물이며, 동물이기 전에 생물이고, 생물이기 전에 물질이며, 물질은 곧 에너지의 파동, 기(氣)의 떨림이다. 이것이 신생 철학이 전제하는 세계관이자 상정하는 주체다. 일원론적, 생기론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나’를 본다. 나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우주 그물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유니버스라는 거대한 컴퓨터가 만들어낸 홀로그램이다. 물질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생기가 곧 나다. 더이상의 나눔과 구분은 있을 수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하늘 위아래 ‘나’만 존재한다. 우주 전체가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인간이기 전에 우주로 보는 것이 초인문학, 트랜스휴머니즘의 종착지다. 인문학에 집착하지 않고 천지인문학을 개척할 때, 우리는 진짜 유니버시티를 구현할 수 있다. 하늘, 땅, 사람이 모두 한 우리일 때, 천지인문학이 열린다. 작은 배움에서 큰 배움으로 나아간다.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