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3년 10월 10일

9. 집단파괴(Genocide)와 생태파괴(Ecocide)






학문적으로 제노사이드의 범위는 상당히 한정되어있다. UN 인권위원회를 기준으로 제노사이드로 인정된 사례는 6가지(아르메니아 대학살, 중국 난징 대학살,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 대학살,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치 대학살)에 불과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규정하는 제노사이드의 범주나 규모는 굉장히 다양하여, 개념을 규정하는데 있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법적 차원, 사회적 차원, 역사적 차원에서 제노사이드를 바라보는 기준은 주로 대량 학살, 인종/민족 절멸 등으로 나뉜다. 이로 보았을 때 한국에는 제노사이드라 규정되는 사례는 없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는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관동대지진 민간인 학살, 제주 4.3 등이 제노사이드에 해당된다. 이 관점은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의 제 2조 “집단살해라 함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이하의 행위를 말한다.”와 맞닿아있다. 이에 집단 학살을 구분된 개체의 파멸로 보고, 분리된 집단 또는 개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제노사이드에 속한다고 판단한다.

이렇듯 집단 파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죽음의 고리에서 이와 같은 집단적 죽임이 어떻게 또 다른 죽임을 불러 왔는지 보기 위해서다. (나는 기본 전제로 죽음을 죽임으로 본다. 윤노빈이 신생철학에서 말했듯 “죽음은 하나의 자연적 부패현상이지만 죽임은 인위적 행위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지를 전개한다.) 학살에 대해 논한 여러 연구가 있지만 이어지는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학살 또는 죽임 간의 관계성에 집중해서 논지를 다루려 한다. 학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하나의 사례로 보는 것이 아닌 각각의 사례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일어났는지, 즉 집단학살이 어떻게 생태학살을 발생시키고, 생태학살이 어떻게 그 지역의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고, 끝내 자살이라는 스스로 행하는 폭력이 어떻게 집단적 폭력과 학살의 증가로 이어지는지를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케이스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지역 또는 집단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죽음과 폭력의 개연성에 주목한다.

현재 집단학살과 생태학살은 ‘genocide-ecocide nexus’라는 명칭으로 여러 지역에서 탈식민지 프로젝트와 함께 연구되고 있다. 이는 주로 식민지배 시절 대규모 학살 또는 착취를 당했던 지역에서 현재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각도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a slow industrial genocide(by Jennifer Huseman and Damien)’와 같이, 식민지배 하에 수탈을 당했던 집단이 식민지 모델의 정치적 상태, 그리고 그 관계와 동일하게 산업적-생태적 관계를 맺음으로서 어떻게 식민적 집단학살이 계속되고 있는지 밝히는 과정이 있다.[1] 또한, 생태학살을 집단 학살의 한 방법으로 보는 연구들이 있다. 환경파괴가 사회 집단의 문화적 또는 물리적 존재를 위협한다고 보며, 이에 생태적 집단 학살과 자본적 투자에 대한 관계성에 집중한다. 이는 자본의 투입과 생태학적 파괴를 일으키는 메커니즘이 집단학살에서 나왔다고 말한다.[2]

내가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본 것은 새만금에 갔을 때다. 지난 6월 영화 <수라>를 보고 7월에 새만금으로 갔다. 이야기로만 듣던 새만금을 처음 보고 정말 많은 땅이 황폐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죽임을 보고 느끼며 세계 최대의 간척지가 세계 최대의 학살지임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 얽혀있는 많은 이해관계를 전해 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토지 수탈과 미군정을 지나 현재까지 이어진 군기지(공항) 문제와 같은 식민지 모델부터 지역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권력 관계, 자본의 개입 등 오랜 기간에 걸친 파괴의 고리가 한데 모여있었다.

이는 여러 연구가 말하듯 식민지배 방식이 어떻게 환경과 그에 따른 자본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는지, 그 방식이 어떻게 생태학살을 불러일으켰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가 새만금 사례를 통해 주목한 것은, 집단학살이 한 집단의 파괴라면 생태학살은 관계의 파괴라는 것이었다. 현재는 집단학살을 인간에 대한 학살로 규정하고, 생태학살을 생태(환경)에 대한 학살로 규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집단에 대한 학살과 관계에 대한 학살로 규정하고자 한다. 인간을 넘어 각각의 집단들이 학살을 당하며(집단학살), 서로 간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주변의 연쇄적 파멸(생태학살)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즉, 관계망으로 얽혀있는 인간-생물-사물이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부분이 파괴되며 부분의 연결들을 파괴하는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곳의 주민들, 철새들, 조개들 등은 그 땅에 기반하여 살았다. 그리고 그 땅을 빼앗기며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터전을 빼앗긴 이후에도 각각의 존재들은 자신의 땅에서 사회적 죽음을 경험하며 계속된 학살을 당했다. 이는 집단과 집단 간의 관계를 끊었고, 결국 생태망의 파괴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genocide-ecocide nexus’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음에 이야기할 ‘ecocide-suicide nexus’로 연결된다.





[1] Dunlap, Alexander. "The ‘solution’is now the ‘problem:’wind energy, colonisation and the ‘genocide-ecocide nexus’ in the Isthmus of Tehuantepec, Oaxaca."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Human Rights 22.4 (2018): 550-573.

[2] Crook, Martin, and Damien Short. "Marx, Lemkin and the genocide–ecocide nexus." Climate Change and Genocide. Routledge, 2017. 46-67.






이희연오스트리아에서 평화학을 연구하고 있다. 폭력과 죽음의 고리를 정치생태 안에서 해석하고, 평화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또한, 현재 플루리버스와 가이아 이론을 한국의 동학과 연결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