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생명, 생각, 생활, 생산


2024년 7월 31일

50. 경계인의 감각

 





“사망자 23명중 17명이 조선족 동포였다는군요. 대부분 연변지역에서 온 30-50대 여성들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전날 벌어진 일이라서 우리 토론의 화젯거리가 됐다. 한달여전 재외 한국인들의 반중정서를 연구하고 있는 한 재미사회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다.

“의외로 조용하네요. 만일 한국인 노동자들이 중국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면, 폭력 사태를 동반한 엄청난 반중 시위가 벌어졌을 거예요.”

나는 설마 그렇게까지야 했겠냐고 이야기하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기에 벌어졌던 1931년의 “만보산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만주의 농지를 개척하던 조선인 농민들이 현지의 한족 농민들과 수로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무력 충돌로 조선인들이 학살됐다는 오보를 내면서, 당시, 조선에서는 조선인들이 화교 상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화교 상점을 파괴하고 수백명의 화교상인을 죽였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일본 정부의 고의적인 조선인과 중국인 이간질 의도가 있었다는 의혹이 있긴 하지만,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중국에서는 왜 역으로 반한 여론이 비등하지 않았을까? 상당수의 자국민이 사망한 사건이기 때문에, 중국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자세히 보도를 했다. 이 자세한 보도의 주요한 내용은 “아리셀공장”에 왜 연변출신 조선족 동포들이 그렇게 많았는지에 대한 점이다. 즉, 단순 노무이지만 시급이 중국의 2~3배에 달하고,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어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공장에서 많이 일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다뤘다. 또, 한국의 젊은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가 되고 싶어하지 않아서 이 노동시장의 빈틈을 외국인들이 채우고 있는 경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댓글 창을 보니 비교적 차분한 반응이 주가 됐다. 요는 중국인들 자신도 당혹감을 느낄 사태의 경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했기 때문에, “납득이 됐다”는 분위기였다. “최저 임금이 50위안이라면 나도 가보고 싶네”라는 의사표시를 하는 댓글이 가장 많았다. 물론, 사고 경위와 안전관리 문제가 있지만, 이에 대한 지적과 책임 추궁은 강도가 높지 않았다. 짐작컨데, 세계 최대의 배터리 생산국가인 중국 공장들의 안전관리가 아리셀보다 나을 가능성이 높지 않으니, 자국 안전관리 문제로 불똥이 튈까 염려한 것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언론들의 조금 더 자세한 보도와 르뽀기사 등이 이어졌다. 연변 출신 조선족 동포들의 한국 취업 실태와 개인들의 다양한 서사도 소개됐다. 특정한 주장이 제기되지는 않았지만, 슬픔에 가득한 사연들을 읽다보면, “이국 타향”에 가서 이런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이런 식의 해외취업은 앞으로 지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댓글 창의 여러 평들은 초반 보도와 크게 다르지 않고, 차분한 편이었다. 꽤 비중있는 보도가 이뤄졌음에도 중국 전체 여론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림 1: 중국 네티즌들의 주요한 반응은 한국의 시급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궁금한 점이 있었다. 만일 사고를 당한 이들이 둥베이의 조선족 동포들이 아니라 타지역의 한족 출신 노동자들이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중국 정부의 언론 가이드라인은 어떻게 작용했을까 등이다. 워낙 인구가 많고 따라서 매일 사고사를 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나라이긴 하지만, 제법 여론이 시끄러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이번 사건의 보도를 통해서도 자세한 내용들이 전해졌지만, 중국인들은 90년대 한중외교관계의 수립 후, 둥베이 지역 특히 연변조선 자치주의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서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또, 딱히 조선족이 아니라고 해도, 둥베이 지역은 경제의 쇠퇴로 과거 10여년 이상 인구 순유출이 급증해, 지역 소멸을 걱정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 값비싼 댓가를 치르게 된 그들의 선택이 “마냥 억울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역시, 둥베이 지역, 조선족이라는 신분이 중국 정부와 주류 중국인들에게 일종의 “경계인”이라는 인상을 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애써 정부와 여론이 나서서 “애틋하게 생각하고 이익을 지켜줘야할 우리편”으로 치부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만이 넘는 중국내의 조선족 동포들은 14억 인구의 중국민 중 어쩔 수 없이 소수자의 위치를 점할 뿐이다.

물론 조선족이 중국 주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일은 내가 알기로는 거의 없다. 특히 3세대, 4세대의 젊은이들이라면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능숙하고, 한족 문화에도 잘 적응한 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여타의 소수민족들과도 상황이 다르다. 신장, 티벳지역과 같은 문화 충돌과 독립문제 혹은 주로 서남부 산악지역등에 사는 소수민족들처럼 농촌지역 경제적 빈곤의 문제 때문에 한족들의 경원이나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별로 없다. 어떤 의미에서 조선족의 중국 사회 위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엘리트들이 많고 현지 문화와 사회제도에 잘 순응해서 미국의 “모범이민 인종”으로 꼽히는 아시안 아메리칸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아니 외모나 언어 사용습관에서 전혀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 더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이들이 중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불리한 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가 약간이라도 있다면 조선족이라는 신분보다는 낙후된 둥베이 지역 출신, 그것도 농촌출신이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중국 주류사회에서 성공한 조선족 동포들은 대개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에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 결혼도 한족 상대를 고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선족 동포 집단은 중국내에서 희석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중국 정부의 정규 학교의 소수민족 언어 교육 시간의 감소 등, 한족 동화 정책과도 연관이 있지만, 그보다는 개개인의 경제적 동기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크게 히트했던 중국 드라마 <장미 이야기 玫瑰的故事>에서 주인공 유역비劉亦菲의 전남편인 조선족 캐릭터가 자신의 출신배경때문에 열등감에 ‘쩐’ 인물로 나오는데, 이는 일정한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라고 하기도 한다. 가난한 지역,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 남성이 배경이 좋은 여성과 결혼한 후에 보이는 강박적 반응으로 비춰진다. 특히 중국내 소수민족은 대학 진학 등 여러면에서 혜택을 받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는 한족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다른 다민족 사회에 비해서는 강도가 낮지만 “경계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전혀 없지는 않다.

역설적으로 조선족 동포들의 농촌 배경은 사실 조선족 동포들이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존중을 받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둥베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쌀을 재배하고, 지금은 이곳이 중국의 고급 쌀 곡창 지대로 탈바꿈하게 된데는 19세기 중엽 무렵부터 간도지역에서 쌀을 재배하기 시작한 조선족의 공헌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내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의 숫자는 이미 80만명에 이르러서 연변 거주 인구를 앞지르고 있고, 이중 3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은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이중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60대 이상의 고령인지라, 이런 신분을 가진 이들은 차츰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또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관점이나 관심이 어떠한지를 이야기해 볼 차례이다. 전체적인 보도 내용이나 반응은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한다. 다만, 흔히 발견되는 극우적 시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 언사를 행하거나, 이들이 과도한 배보상을 노린다는 식의 여론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사고가 일어났던 며칠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냥 무관심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워낙 산재도 많고, 억울한 죽음도 많은 한국 사회에서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문득, 14억 인구의 중국에서 2백만 여명의 소수민족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5천만중 80만의 조선족 동포가 한국 사회내의 소수민족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됐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든 아니든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여전히 “경계인”의 신분을 가진 채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국적을 획득한 이들중 몇대가 지난 후에야 사라질 수 있는 감각이다.

한국 사회, 특히 대중매체와 영화 등이 조선족 동포들을 악마화하거나 희화화하는 문제는 이미 이십년 가까이 한국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수자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진보 매체를 비롯한 주류 언론들도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MZ세대가 중국에 대해서 느끼는 부정적인 인식이 조선족 동포 사회에도 투영이 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조선족 동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실제 인지와 가치관의 충돌이 악순환에 빠지면, 대개 사람들은 아예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나는 최근에 한 유명 여행 유튜버가 둥베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조선족 동포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보고 마음이 언쨚아졌다. 그는 어릴 적 중국에서 성장하고, 중국 학교를 다닌 덕에, 현지인과 구분할 수 없는 완벽한 중국어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언어나 외모덕에 당연히 현지의 중국인들은 그에 대한 경계심이 적은 편이고, 비교적 솔직하게 중국 사회의 이런 저런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이런 모습을 한국의 팔로워들에게 전하는데, 전반적으로는 중립적인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한족 친구들이 많고 또 가깝게 지냈던 죽마고우 조선족 동포 친구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가 조선족 동포에 대해서 쓴소리를 늘어 놓은 직접적인 계기는 그의 유튜브 영상물에 대한 악플 때문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그의 컨텐츠를 “불펌”하여 또우인(抖音, 틱톡의 중국판) 등에 올리고, 여기 엄청나게 많은 악플이 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악플들중 상당수가 한국어이고, 또 조선족 언어 습관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조선족으로 추정되는 악플러에게 많이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유튜브 댓글창에도 그를 비판하는 조선족 출신 유튜버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우선 그가 조선족 동포를 포함한 중국 네티즌들의 불법적이고 악의적 댓글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댓글 전쟁이나 그 수준을 보여주는 인터넷 문화는 사실 중국인, 조선족, 한국인을 포함해서 누구도 자랑스럽다거나 당당하다고 말할만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유명 유튜버로서 이런 일은 굳이 마음에 담아 두지 않거나, 문제가 심각할 경우에는 사법적 대처를 해버리는 것이 맞다. 댓글의 집단을 특정하고 일반화해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족 동포 집단을 나름의 기준으로 구분해서, 자기는 “태도가 애매한 조선족” 동포 집단과 어렸을 적부터 어울리기 힘들었으며, 다른 재외한국인들과 비교했을 때, 경험할 수 없었던 이런 부정적인 면모를 조선족 동포들에게서만 많이 봤다고 직격한다.

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조선족 동포 집단은 아예 “한국에 들어와서 최대한 한국화하고 한국인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중국 주류 사회에 당당하게 진입해서 한족들과 경쟁을 하고, 한국인들에게도 특별히 열등감이나 질투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와 비교해봤을 때, 그가 제3의 집단으로 분류하는 조선족 동포들은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애매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면서 “양쪽에서 자기 이득만을 챙기려 하는 기회주의적이고 음험한 집단”인 것이다.

이런 커멘트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그가 경계인의 정체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이를테면 재미동포나 재일동포와 같은 다른 경계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경계인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회든 주류에 속하거나 주류에 속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일 수록 특정한 주류적 정체성을 많이 강조하고, 다른 정체성을 억누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모든 유기체나 유기적 조직은 핵심과 변경, 즉 경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 민족이라는 집단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서 핵심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한다. 만일 핵심과 경계가 나뉘지 않는다면, 어떤 의도나 방향성, 목표도 갖을 수 없다. 이 물질은 유기체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엔트로피가 매우 높아진 무질서, 즉 열적 사망 상태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유기체가 자기의 핵심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아주 특수한 조건과 맥락 때문에 자기의도와 무관하게 경계에 놓이고 되고 복합적인 정체성중에서 한쪽을 택하기 어려운 집단들이 존재한다. 대개 이들은 경계인이기도 하고, 소수자이기도 하다. 조선족을 포함한 재외 동포들도 이런 집단에 해당한다. 나는 스스로 선택해서 경계인이 된 경우이긴 한데, 예외적인 사례로 봐도 좋다. 나는 한국인이고 중국에는 결혼 비자로 머물고 있을 뿐이지만 (몇년 후에는 영주권을 취득할 수도 있다), 내 아내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중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을 포함해서 누군가가 중국에 대해서 근거가 약한 험담을 늘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언쨚아진다. 물론 중국인이 한국을 욕하면 더욱 기분이 나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 한국인이 홍콩을 여행하면서 그곳 실정을 전한 글을 접한 적이 있다. 그는 카페나 식당에서 만다린을 사용하면, 서비스 태도가 매우 나빠지는 것을 관찰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좌석에 앉아 있던 홍콩인 고객들이 한국인임을 알고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는 것에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2019년 반송중 사태 이후, 홍콩의 정치와 사법제도가 완전히 독립성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많은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와 중국 시민에 대해서 일종의 “원한 감정”을 품게 됐고 그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내가 기분이 유쾌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만일 나와 아내가 홍콩에 갈 일이 있는데, 만다린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쾌한 경험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홍콩인들이 지난 5년간 겪은 고통은 공감을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가능하다면 그들에게는 영어나 광둥어를 사용해서 정서적 지지를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쨌든 나와 아내는 항상 만다린을 사용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만다린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이들이 단지 언어 사용문제 때문에 나와 아내를 푸대접한다면 나의 홍콩행은 기분 좋은 여정이 되기 힘들 것이다 (나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다만 그런 소식을 전하면서 중국인들은 험한 꼴을 겪어도 싸다는 식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1998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다국적 컨설팅 기업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굉장히 많은 재미동포들이 미국인 혹은 서구인 직원들과 함께 한국에 장기 출장을 와서 일을 했다. 소위 “엑스팻expat” 신분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주재원”은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다. 급여는 미국 사무소 기준으로 달러를 받고, 두둑한 출장비를 따로 챙길 수 있다. 회사가 경비를 대는 고급 호텔과 레지던스에 장기 투숙하고, 주말에는 고급 클럽 등을 드나들며, 젊고 아름다운 한국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권자 역할을 하는 백인 임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한국 기업이나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런 저런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시 상황때문에라도 낮추어 보는 의견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교통법규 위반을 하고도 한국어를 못하는 척 연기해서 난감한 표정의 교통 순경이 그냥 보내줬다라는 모험담을 늘어 놓을 때는,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불쾌한 지점이 있었다. 그래서 현지 한국인 직원들중에는 이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미국 주류 사회에 제대로 들어갈 수 없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던 이들이 한국에 와서는 아니꼽게 점령군 행세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식으로는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늘어 놓았다.

일본에서 일을 할 때는 같은 회사에 재일교포 출신 직원들이 있어서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겪는 차별대우에 대해서 자주 분노를 표시했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논리로 (일본인이 ‘조센징’은 불결하다고 보던 관점 그대로 조선족 동포는 위생관념이 약하고 불결하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에 와서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을 비난하는 언사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두 사례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디아스포라 경계인들이 얼마나 심한 정체성 충돌을 경험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어떤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그들이 원래부터 기회주의적이거나 야비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 복수의 대등한 정체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때, 별 고민없이 가장 생존에 적합한 공리적 선택을 하면서 가치관이 충돌하거나 모순적으로 보이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는 사례일 뿐이다.

내가 언급한 재미동포들의 행태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소수사례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미국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자 닮고 싶어하는 목표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이 싫어서” 미국에서 취업하려는 엘리트 청년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만일 미국에 장기 거주할 예정이라면 과연 미국인과 한국인의 정체성 중 어떤 것을 선호할까?

다시 여행 유튜버의 사례로 돌아와 보자면, 그의 둥베이 여행은 동북공정이나 한푸-한복 논쟁에 집중하다보니 평소의 중국 여행 컨텐츠에 비해서 반감을 많이 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조선족 동포들이 “중국인 편”에 서서 중국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애매한 입장 취하지 말고 너희 정체를 분명히 하라”는 요구를 하거나 “한국의 투자나 한국의 국제적 위상 덕분에 당신들도 중국에서 더 잘살게 된 것인데. 은혜를 모르고 중국인 입장에서 한국을 비판하느냐?”는 불평을 늘어 놓았다.

여기서 길게 동북공정이나 한복-한푸 논쟁 등을 다시 언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논쟁의 배후에 놓인 상황은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대국의 위협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 한국과 정의롭고 진보적인 한국인들”과 “중화중심주의, 팽창주의에 눈이 먼 중국과 그 애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중국인들”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역사적 서사와 현실 문제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차분하게 논의되는 공론장은 매우 부족하다.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적 역사사관과 서사가 기실 중국인들의 “위대한 중화민족” 서사 만큼이나 자기 중심적이이고 애국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심지어 구석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유사역사학”이 양지로 당당히 걸어 나와서 역사 전문 연구자들을 핍박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또 이에 대한 극단적인 반작용으로 극우 진영 일부에서는 일본 식민 시기의 근대화를 일방적으로 예찬하는 뉴라이트 사관이 득세하기도 한다. 사실 조선족 동포들이 한중문화 갈등에 대해서 보이는 “애매한 태도”를 통해 경계인의 정체성을 깊이 들여다봐야할 필요성은 이렇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봄으로써” 오해와 갈등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사회가 더 많은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소수자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진보적 설교를 늘어 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아니라도 한국의 좌파와 진보는 이러한 담론의 전파에 충분히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이 핵심과 경계의 존재는 유기체의 필수 생명 조건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유기체의 정합성과 생명이 보장되는 한도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다만, 조선족 동포나 외국인 노동자의 한국 사회 포용 문제는 과거처럼 한가롭게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조선족 동포와 관련해서는 악화일로의 한중관계와 연관하여 큰 열쇳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졸저 <차이나 리터러시>에서 한중관계 개선의 출발점이 한국인들이 조선족 동포들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최근에 나는 이 문제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미중관계와 한중관계의 악화로 중국에 체류하며 비즈니스를 하고 공부하는 한국인들이 갈수록 줄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나처럼 중국인 가족을 두고 있거나, 선교 목적을 가진 기독교인들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극소수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조금 눈길을 돌려 생각해 보면, 바로 조선족 동포들의 네트워크가 있다.

특히 조선족 동포들의 비즈니스 네트워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을 때, 중국에 남은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 동포들이었다. 이들은 같은 영역의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해당 산업내에서 전문가로 남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인 사장들이 이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제법 들었다. 즉, 중국 정부에 털려서 빈몸으로 야반도주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상당부분, 조선족 동포 부하직원들에게 중국내 고정 자산과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빼았겼다는 서사가 포함돼 있었다. 나는 이런 주장에 상당한 의문을 품고, 중국에서 10~30년 이상 머물면서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사정을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들중에는 한국인 사장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즉, 당시 한국에서는 그다지 경쟁력이 없는 사업거리를 들고, 낙후한 중국 시장에 들어와서 성공한 사업가들중에 중국 시장이나 거래처, 대정부업무에서 철저하게 조선족 동포에 의지할 뿐, 중국 시장과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언어나 문화 모든 영역에서 그들에게 의존하다보니 결국 자연스럽게 실제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은 오롯이 이들 조선족 동포들이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변화하는 시장 환경이나 정책도 이해하지 못하고 “거드름이나 피우는” 한국인 사장에게 계속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는 직원들이 몇이나 될까? 요새 한국에서 유행하는 드라마 <좋좋소>의 노사관계 에피소드들을 떠올리게 된다.

90년대에도 그러했듯이 우리가 앞으로 중국과 다양한 차원의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양쪽 사회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으며 중국내에 여전히 안정된 생활과 비즈니스 기반을 보유한 조선족 동포 네트워크는 대단히 중요한 우리 민족의 자산이 아닐까? 그런데 이들에게 과연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민족에만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민족서사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와 정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인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조선족 동포 같은 디아스포라 경계인이나 북조선 인민과 같이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지만 하나의 “네이션 스테이트”로 귀속될수 없는 사례이다. 내 경우를 밝힌 바와 같이 나는 한국 국적과 한국 국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관계로 인해서 생기는 또 다른 서브sub정체성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다른 인종, 민족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 노동자들이 한국 국적을 획득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서 이런 복잡성과 다양성이 증가할 것이다.

경계인들의 정체성이 주류 한국인의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유튜버의 사례처럼 애매한 경계인 정체성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고 “잘살게 해준 한국의 은혜에 고마와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한국 사회는 앞으로의 변화에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 유튜버가 겪은 사례와 같이 중국내에서 혹은 한국에서 한국과 관련한 부정적 컨텐츠를 만들거나 한국과 관련한 악플을 퍼붓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만일 조선족 동포중에 이런 흐름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는 왜일까? 그건 이들 일부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품게 된 원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조선족 동포들을 악마화한 내용들이 반복적으로 제작됐고 심지어 잘 팔리는 K-컬쳐 상품이 돼, 중국이나 다른 국가들에서도 유통이 되면서 국제적인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버렸는데, 그들이라고 한국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 당시 소수민족 복장으로 한복을 입고 나온 조선족 동포들을 느닷없이 한복 문화를 훔쳐간 도둑으로 몰아 세운 한국 사람들을 그들은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한대로 “복합적 정체성”은 경계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작용한다. 이를테면 소위 중국인 혹은 화인 사회에서 이런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대단히 복잡한 민족적 역사와 이민사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중국 대륙에서 독립을 원하던 홍콩과 대만 시민들의 사례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특히 영국으로 이주한 홍콩인들이나 대만 민족주의와 국가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 시민들은 이미 명확하게 다른 국민 정체성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중국의 대륙 출신 망명 언론인이 대만의 총통 선거를 취재하면서 빚어진 마찰은 매우 흥미롭다. 왕지안王志安이라 불리는 이 언론인은 원래 CCTV에서 잘나가던 탐사보도기자였는데, 자유주의적 언론관이 끊임없이 조직과 충돌하면서 CCTV를 사직하고 중국내에서 독립 미디어를 운영하는 “유튜버 언론인”이 됐다(유튜브가 아니라 중국내의 미디어 플랫폼). 한때, 그의 글이나 영상이 수억대의 뷰를 기억할 정도로 영향력을 얻었는데, 결국 중국 정부(인터넷 매체를 관리하는 왕신반網信辦)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그의 어카운트들을 모두 폐쇄했다. 딱히 반공산당이나 반정부적인 보도를 한 적이 없어도 대중여론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 사소한 트집을 잡거나 정확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이 이렇게 폐쇄되는 경우가 중국에는 매우 많다. 권위주의, 관료주의의 문제이다. 정치적 탄압이 아니라 탐사보도 때문에 생겨난 그의 적이 이런 관료주의의 맹점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유민주체제 국가의 저널리스트들이 중국 정부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크다.

어쨌든 그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중국 여권을 가지고, 대만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에도 취재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정부에 대한 비판이 일방적인 혐중이나 반중 정서와는 구별돼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본질주의적이거나 진영논리 관점을 갖고 있는 해외의 소위 화인 민주인사들이나 사이비 종교의 성격도 없지 않은 파룬궁法輪功단체와 거리를 둔다. 이때문에 그들에게 오히려 중국 정부 대외선전선동의 교묘한 앞잡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만의 경우에도 제3자적인 관점에서 대만 정당들의 선거운동을 취재했는데, 그는 민진당의 대만독립 주장이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에 반대하는 평과 대만 민주주의의 포퓰리즘 성향에 대한 비판을 대만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겼다. 결과적으로 민진당 정부에 의해서 향후 5년간 대만 입국을 금지당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와 대만 민진당 정부 양쪽의 정치적 탄압을 받는 거의 최초의 언론인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양안관계를 둘러싼 대만인들의 현실적 바람은 현상유지이다. 우리는 이미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끄고 있으니, “제발 우리를 가만히 놓아 두어 달라고 Leave me alone!” 절규한다. 이들은 홍콩에서 벌어진 일이 대만에서 재현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왕지안의 생각은 다르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바람이 이뤄지기 힘들다고 본다. 언젠가 미국이 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철수하는 순간, 그들의 운명은 중국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대만 언론인들은 그에게 흥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중국 시민을 중국 공산당 정부에서 떼어 놓고 볼 수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다고 답한다. 중국 시민들 중에도 공산당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대만을 점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데, 대만 사람들은 이미 크게 겁에 질려 있는 패닉상태이고, 지금은 중국인들의 복합적 정체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왕지안은 여전히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림 2: 최근 개봉한 대만영화 Zero Day는 최근 진행됐던 대만 총통 선거 이후 중국이 실제 대만을 침공해서 교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가상으로 영화화했다. 대만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감과 불안감의 정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대만이 중국인들을 적대시하기 보다는 화인사회에서 싱가폴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현대화된 정치제도를 갖춘 “화인지광華人之光”의 희망으로 남는 것만이 중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한다. 다수의 대륙 중국인들이 이런 생각을 품는다면, 공산당 정부도 함부로 무력 통일 시도를 강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나는 대만 언론인들과 왕지안의 이런 대화를 흥미있게 들으면서 중국인들의 국민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나는 왕지안과는 조금 다른 답변을 하고 싶다. 중국 정부와 중국 시민은 입장을 공유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개인과 사안 모두 따로 떼어 보는 것이 맞다. 지난번에 썼던 글에서 마보용馬伯庸이라는 한 젊은 작가의 내적 정체성이 충돌을 일으킨 최신 작품에 대해서 평론을 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배경 설정을 빌어서 현재 대만의 정치적 상황과 미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보용은 작품속에서 일관되게 소설속 주인공을 “평화주의”나 “개인주의”에 가까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는데, 결론 부분에서 갑자기 “중국의 대일통 사상”을 시전하는 애국주의자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 혼란을 느끼게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생각과 그의 마음속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서구 지식인의 가치관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서사의 논리적 구조의 정합성와 애써 빌드업한 인물의 입체적 성격을 파괴하고 있다고 평했다.

오히려 그가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한 대일통 사상이나 지정학적 사고를 일정부분 공개적으로 긍정했다면 이런 억지스런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대만을 독립시킬 수 없는 명확한 지정학적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런 국가 이성은 국민 개개인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만일 중국이 남쪽 바다로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는 권한을 상실하거나 대만에 중국 대륙 연안도시들을 겨냥하는 치명적인 로켓 무기들이 설치되는 상황은 분명히 중국 정부뿐 아니라 중국의 민간인에게도 불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 개인의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적 가치관과 국가이성을 지지하는 국민으로서의 가치관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과 같은 방법, 무력 통일과 같은 방법 대신에 다른 식으로 대만과 대륙의 미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차이나 리터러시>에서 국가간의 갈등이 벌어지는 분쟁지역을 “회색변경 지대”로 설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보인 적이 있는데, 당장 현실성이 부족하더라도 지식인이라면 자유로운 생각의 제시도 가능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만, 중국의 지금과 같은 수준의 언론과 사상통제 환경에서 쉽지 않은 사고의 전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양안관계가 공포와 분노, 증오의 악순환에 빠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나는 한중관계속에서의 갈등을 풀어나가는데 양국 사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서 <차이나 리터러시>를 작년에 출간했다. 하지만 최근에 깨닫게 된 사실은 우리의 담론을 지배하는 것이 더 이상 한중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미중의 헤게모니 쟁패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올해 들어서 특히 over-capacity 논란이나 일대일로, 위안화와 달러의 경쟁 등, 경제논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프로파간다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우연히 미국 사회에서 몇년 째, 아시안 아메리칸과 백인, 흑인, 라티노사이의 문화적 담론 갈등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바이든 정부들어서 이런 현상이 매우 심화됐다. 과거 트럼프가 아시아인이나 중국을 악마화 할 때는 주로 민주당 계열의 지식인이나 문화 오피니언 리더를 중심으로 이 메시지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바이든 집권후 민주당이 중국에 대한 선전전을 강화하자, 더 이상 PC적 정당성이 중국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에서 출생한 소위 ABC American Born Chinese들이 자기비하에 빠져들고 있다고 한다. 미국 주류사회가 이미 착한 아시안과 나쁜 아시안을 구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전자에 속하는 반면 중국인들은 후자의 범주로 떨어진다. 결국 중국과의 관계나 중국성chineseness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철저한 미국인이 되는 것만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미국과 자신의 민족적 모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한 2023년 Pew리서치 센터의 조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마치 한국사회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한국인들이 미국의 이런 담론에 지배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시안 아메리칸중 중국을 가장 혐오하는 것은 실질적인 위협을 받고있는 대만인들을 제외하고 바로 한국인들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혐중과 반중 정서는 당분간 우리 사회에서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하드파워는 여전히 상승을 지속하며 미국을 긴장하게 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하드파워 경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중국 사회 내부의 자유도는 줄어들고 있으며, 내외부적으로 중국에 대한 매력을 상실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국의 소프트파워 상승은 훨씬 오랜 시간을 요할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이 문명차원의 담론 헤게모니를 쥐게 될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림 3: 차이니즈 아메리칸을 포함한 아시안 아메리칸들은 중국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중 중국에 의해 실존적 위협에 처한 대만을 제외한다면 코리언 아메리칸의 혐중이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내가 <차이나 리터러시>에서 기술한 르상티망과 같은 코리언 특유의 피해의식, 그리고 미국과 서구의 차이나 포비아 프로파간다를 가장 잘 내면화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관찰도 있다. 미국의 주류 사회는 K-문화에 대한 수용이나 거부를 통해서 아시아 문화가 주류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KoreaBoo라는 단어는 백인을 포함한 미국내 비 아시아인종들이 K컬쳐에 열중하는 동류를 비웃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국 문화는 일정 부분 아시아 전체를 대표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백인 여성이 중국인 남성과 데이트를 하면 역시 Koreaboo라고 비웃음 거리가 된다는 설명이 그러하다. 그런데, 과거 일본 문화가 서구사회에서 환영을 받거나 중국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실은 지금 미국 주류사회가 K문화를 수용하는 것과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고 한다. 더 이상 소수의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선호하는 문화가 아니라, K문화가 여러 매력적인 외형적 스타일의 조합을 통해 문턱을 낮추고 일종의 일반성을 띄게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K문화가 자기 고유의 본질이 아니라 외부에서 받아들인 다양한 문명적 요소를 형상화한 “빈 그릇”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메시지보다는 매체가 주가 된 문화라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한국 문화는 조선왕조 이래, 중화문명과 서구문명이라는 외래 문명을 절대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본질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즉, 중화문명 500년과, 서구 근대문명을 본질화하는 일본문화 100년, 그리고 IMF 사태 이래 미국문화 30년의 시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총합이 바로 지금의 K문화의 외형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외래 문명의 영향을 걷어내고 우리 고유의 무엇이 존재하는지 살펴보려다가 “샤머니즘”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샤머니즘은 인류 공통의 문명 유산이지 특정한 종족이나 민족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표현 양식은 조금 다를 수 있어도, 샤머니즘의 공통 기능은 동일하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말과 한글이 거의 유일한 한국 문화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문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는 앞으로도 많은 토의와 분석이 필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과연 우리에게 한국성Koreanness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논의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자기화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우리가 자기 본질을 지나치게 절대화하거나 결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민국가 미국이 형성됐던 과거 200년의 시간처럼, 오히려 더 많은 경계인들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참고 자료와 영상

· 韩国电池厂火灾17名中国工人遇难:临时工大国的危险隐患
https://mp.weixin.qq.com/s/o7fLlUMS60kA9-Zi2fL8xw

· 韩国“淘金”热:中国工人殒命大火背后
https://mp.weixin.qq.com/s?__biz=Njk5MTE1&mid=2652621653&idx=1&sn=860bfe6f71996db1d4d61bb2668ecbf1&chksm=33da36d104adbfc7b8e135ac319828f6daee339129e44d3144214e5b21f1a8da5b31b037867c#rd

· 那些去韩国做“日当工”的朝鲜族人
https://mp.weixin.qq.com/s?__biz=MzU4NDQ5MzkwNQ==&mid=2247496900&idx=1&sn=ee79c100ffa4802f9b60546946345c04&chksm=fd9a4afacaedc3ecad270c97dc34f54dced2e1b400c528efa1bd7ad27e5a9414a8f081915d6a#rd

· [세상읽기] 중국인 혐오의 이유를 묻는다 / 조형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7550.html

· 300多年前,连一株水稻都没有的东北,为何会变成我国的粮仓
https://mp.weixin.qq.com/s/xV0YsxMrjUicOBln5Pf5EA

· How Did A "THIRD" Korea form? (In CHINA...) - Pt.1
https://www.youtube.com/watch?v=r1dH0ZXaJhs&t=1681s

· How Did A "THIRD" Korea form? (In CHINA...) - Pt.2
https://www.youtube.com/watch?v=9sOtaE1gi5M&t=7s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저자 곽승지 교수와의 대화...2024.4.25 시청자와 함께 하는 4차 공개토론 모임[전체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SRij93DfAGQ&t=2843s

· "조선족사회의 나아갈 길"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곽승지 전 연변과기대 교수 강연을 듣고...
https://www.youtube.com/watch?v=a5TtLuJCZfk

· 高句丽[gāo gōu lí]
https://baike.baidu.com/item/高句丽/181650?fr=ge_ala

· [이슈 인터뷰] 이문영 작가 "'전라도 천년사', 유사역사학 추종자들 '날조'로 '식민사관' 전락"
http://www.nwt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6485

·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8조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7242032005

· 白紙運動是徒勞?外界看中國視角太「功利」!中國人其實不想推翻黨?ft.前央視記者 王局| 斐姨所思【阿姨想知道】 EP137
https://www.youtube.com/watch?v=JPx2eQYqmGQ&t=1096s

· The KK Show - 174 前中國央視調查記者 - 王志安
https://www.youtube.com/watch?v=yMcgd--dvr8&t=23s

· Wang's News Talk :Return from Taiwan
https://www.youtube.com/watch?v=gEqGotPyMuI

· Wang's News Talk|Return From Taiwan
https://www.youtube.com/watch?v=0yUTxjt4FV8&t=1148s

· 49. 남방의 미식美食 여정에서 시작된 문명의 회심回心
https://thetomorrow.cargo.site/49

· Are Koreans The SUPERIOR Asian Right Now?
https://www.youtube.com/watch?v=Wdi8JbsgRjA

· Why Are You Ashamed Of Being Chinese?
https://www.youtube.com/watch?v=9RZyNp3lUls

· Pew Research: Asian Americans' views of their homelands, other Asian countries, and the US.
https://www.reddit.com/r/asianamerican/comments/15m4cf0/pew_research_asian_americans_views_of_their/?rdt=40744

· Most Asian Americans View Their Ancestral Homelands Favorably, Except Chinese Americans – Pew Research
https://www.forbes.com/sites/russellflannery/2023/07/19/most-asian-americans-view-their-ancestral-homelands-favorably-except-chinese-americans--pew-research/

· Most UNLIKED Asian Country Amongst Asians
https://www.youtube.com/watch?v=OiEuTvuHlTA&t=29s

· “Stop Being a KOREABOO!” It’s Bad Now
https://www.youtube.com/watch?v=NKn7m65pWIw&feature=youtu.be

· 1. 넥스트 커뮤니티의 심연을 찾아서
https://thetomorrow.cargo.site/1-24







김유익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 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